비누에 대한 사유 외 1편/ 송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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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0 11:06 조회3,33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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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에 대한 사유
비누가 비누임을 고집하면 비누일 수 없다
비누가 비누일 수 있는 것은 물과 만나서이다
물과 만나 제 몸을 허물어뜨리며
거품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아니, 비누가 비누일 수 있는 것은 몸을 만나서이다
거품을 받아주는 단단한 몸
단단한 비누와 단단한 몸을 이어주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거품, 미세한 틈새와 기포
그 미세한 틈에서 그대 몸도 비누처럼 풀어진다
비누와 거품과 그대 몸은 하나가 되어 미끈거린다
물처럼 형태를 벗는다
시는 어떤가
나의 사유를 지나 부드러운 혀로 풀어주는
부드러운 혀로 풀려 굳은 그대(혹은 그대들) 가슴 빗장 어루만지는
나와 그대와 혀가 하나 되어 풀어지는
그 거품과 물의 시간은
구두 한 짝
횡단보도 가운데 놓인 구두 한 짝을 보았다
추적추적 비 오다 말다 하는 날이다
바퀴에 밟히고 치여 납작해진 남루
옆구리에 뭉클 금이 가 있다
간밤 사고의 흔적, 수습되지 않은 유품
누군가 돌연 세상을 향해 던진 분노의 짱돌
길 건너던 치매 노인이 문득 벗어둔 것
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심코 신발 벗어 든 적 있다
전두엽이 추락의 순간을 예감 했던가
스스로 추락을 택한 사람들은
빈 손 같은 신발 한 켤레 뒤에 남긴다
입을 벌린 신발은 지독한 허기의 표현이다
구두 한 짝 벗어놓고 절름거리며 간 사람
남은 한 짝으로 세상을 건너는 사람
짜부라진 구두에 빗물 흥건하다
달려오던 버스 바퀴에 뒤집혀 아스팔트에 엎어졌다
엎어져 한 생애를 토하고 있다
송은숙
2004년 『시사사』신인상으로 시 등단
2012년 시집 『돌 속의 물고기』 출간
2013년부터 <울산신문> ‘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코너에 에세이 기고 중
현재 학교와 도서관에서 독서와 논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