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

이성렬

수많은 계절이 사슬을 쩔렁이며 흘러갔다. 지금은 기억의 충정을 헤아리는 시간. 내가 사랑했던 장면들은 얼굴을 벗은 채로 가슴을 섞는다.

한없이 멀리멀리 가거라 - 작별을 고할 때, 식탁 아래 깨어진 그릇 조각들이 공중에서 만나 유리벽 사이 경계를 지우며 답한다.

행복한 외출이 되기를. 그러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가증스런 자의 명함을 빗속의 장독 위에 놓아두었다, 스스로 거처를 정할 수 있도록. 며칠 후 누군가 미움을 모르는 이가 가져갔는지, 곁에 핀 백일홍에 흰나비 한 마리 조용히 앉아 있었다.

초등 2학년 교실. 구구단을 판서하던 여선생님이 뒤를 돌아보며, 주위 산만한 소년의 깡마른 뺨을 향하여 묻는다. 유학 갈 채비는 잘 되어 가니? 화학과라고 했지? 나도 시카고에 가고 싶어.

중학교 방과 후의 교무실. 공납금을 내지 못한 몇 학생들이 서로 외면하며 대기한다. 소년은 낮게 말한다 - 저는 지금 몹시 가난하지만 나중에 이 모든 신세를 갚을 거예요. 친구가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짓는다. 이 선생, 이번에 좋은 논문을 발표하여 푸짐한 상금으로 한 턱 쏘신다고요?

산본 중심상가의 <백암순대국>. 살림집이 없는 주인 부부의 네 살 여자아이가 하루 종일 손님들 사이에서 놀고 있다. 자정이 되자 그 이층방은 단아한 전원주택으로 변하고, 눈매가 깊은 중년 여인이 뜰에서 채소밭을 매고 있다.

학교수업을 거른 채 방황하는 고등학생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그 해 미전 대상 수상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마주한다.

신문에서 본 파블로 네루다 노벨상 수상기념 낭송회를 물어 동숭동 흥사단회관을 찾은 까까머리 학생을, 머리칼이 희끗한 여자시인이 손을 잡으며 반긴다 - 작년 가을에 나온 선생님의 시집이 참 좋아요.

부천의 의료요양원 <모시는사람들>. 팔순의 모친에게 탄식하자 - 왜 이런 끔찍한 집안에 시집와서 그렇게 고생하셨어요 - 서른 살의 어머니가 당부한다. 상왕십리 동원극장에 <쌀>이라는 영화가 들어왔다더라.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혼자라도 가서 보렴.

무너진 무대 위 배우가 배역과 대사를 버리고 나풀나풀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 오래전 낯선 도시의 나비박물관. 누군가 안개 자욱한 아침에 날개의 유해를 종이배에 띄워 보낸다.

초등학교 졸업식장, 15년 후 그녀의 음성이 가볍게 포옹하며 묻는다. 너는 지금 몇 년도에 와 있는지?

홀로 바닷가에 누운 저물녘, 발바닥을 간질이던 홍게의 무리가 서쪽하늘 가득 날아오르는 썰물의 시간 - 사방에 흩어져 살던 비탈들이 젖은 시야 속으로 와글와글 모여들어 해안에 빛나는 정경을 본다.

*프리다 칼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