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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 유리벽 /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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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3 03:50 조회3,097회

본문

행적 - 유리벽

 

  이성렬

 

 

그 거대한 유리돔은 안식일 새벽에 소리 없이 내려와* 모든 출구를 덮었다. 도시고속도로를 달리는 몇 대의 차량과 이륙 중이던 비행기 한 대가 유리벽에 충돌했을 뿐, 세상은 잿빛으로 고요했다

 

보이지 않는 담벼락의 강림으로 가족을 잃은 주민이 방송사에 알렸으나, 민심의 동요를 염려한 당국의 요청으로 무시되었다.

 

다음날, 거대운석에 의해 세상이 끝장날 수 있음을 역설하는 천문학자의 인터뷰 기사가 아침 신문들의 1면을 일제히 장식했다.

 

방위청은 강력한 유리면이 자외선을 흡수하여 오존층이 궤멸되어도 시민들은 영원히 무사할 것이라고 공표, 기상대장은 태풍이라는 단어를 잊어도 될 것임을 확인했다.

 

그 해 겨울, 신경증이 도진 밀실공포증 환자가 글라이더로 도시를 탈출하려 하자 수송부는 즉시 모든 비행체를 해체, 사학자들은 다빈치 이후 모든 날틀의 설계도를 폐기하였다.

 

기억은 혁명을 유발한다 철학 교수의 건의에 동의한 당국은 이어, 날개를 가진 생물종들을 살처분하였다. 멀리 날지 못하는 닭과 거위, 동물원의 타조들만이 살아남았으며, 린네의 분류학에서 조류가 일체 삭제되었다.

 

지진을 폐지하려는 지질학자들이 새로운 경계조건 하에서 지층들의 응력을 계산하기 시작했으며, 율사들은 의심이라는 죄목을 법전에 추가하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소집된 비대한 주교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윽고 철저한 수색 끝에 싸르뜨르 소설이 모든 가정과 도서관으로부터 수거되었고, 우주공학자들은 나침반자리, 망원경자리의 별빛을 분산시킬 회전 반사경을 상공에 설치하였다.

 

영상공학자들은 고된 연구 끝에 유리돔에 비추는 첨단 증강현실을 개발, 인자하게 두 팔을 벌린 스핑크스의 구름 형상을 해질 무렵에 펼치곤 했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안전한 생에 감사하는 시민들은 바깥세상을 혐오하였다. 하늘벽의 기억은 소진되었으나, 시간의 붉은피톨들이 한 알 한 알 공고한 유리벽에 갇히게 되었음을 누구도 알아채지 않았다.

 

*드라마 <Under the dome>의 장면

 

 

<현대시학>, 2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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