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 굿(巫)/ 강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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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5 12:12 조회3,30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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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 굿(巫)
강신애
당신이 나를
흰독수리깃으로 정화해주던 날
꿈을 꾸었습니다
코요테의 언어로 말하고
사슴의 뿔로 분노하라고
희끗한 어둠 속에 선명한 목소리로 말하였지요
나를 가지에 꿰어 수로에 버려두세요
곰의 먹이로나 줘버리세요
어떤 치병 굿으로 저 바다를 정화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독수리가 죽어야 거친 물결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심해에 엉켜버린 미래의 흔적을 발굴하다
무중력의 계절이 바뀌고
당신이 나를
흰독수리깃으로 정화해주던 날
꿈을 꾸었습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밤새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성인식을 치르고 또 치렀습니다
파라고무나무 수액을 입힌 천으로
진즉 젖은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하였으니
어떤 치병 굿으로 저 바다를 정화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독수리가 죽어야 거친 물결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산속 깊은 곳에서
밤새 노래하고 춤을 출 뿐
- <석탄대(Coal sack)>84호, (2015년, 12월)
일본 잡지 <石炭袋(Coal sack)> (84号)에 소개된 <오래된 서랍>과 <깃, 굿>에 대한 고형렬 선생님의 시평 번역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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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리해 둔 추억’은 시인만의 것이다. ‘노랗게 퇴색한 편지 봉투’가 마음에 걸린 시가 있었다. 서랍과 그 봉투는, 시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물증이며, 틈새이다. 시인은 그 서랍을 닫은 적이 없었다. 그가 그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배후에 있는 조그마한 책상 맨 아래 서랍이, 무릎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누가 열어 볼 수 있을까? (시인도 열어 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시구는 지금처럼 과거를 인식하는 ‘현(弦)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 / 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는 곳이다. ‘수사자처럼 사정없이 살을 잡아채고, 순식간에 마음을 / 텅 비게 하는 때가 있다’는 것에 이 서랍의 비밀은 있다.
사회적 감정이 잘 억제된 ‘깃, 굿’은 내부의 ‘무(巫)’의 감정을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 이 ‘무(巫)’도 또 여성의 영혼 속에 잠재해 있는 핵심적 언어다. 분한 생각과 분노가 충돌하고 있던 ‘세월호’ 침몰 참사는 다시 한 번 한국인을 고통의 나락으로 몰아넣으면서 의식을 진화시켰다.
‘당신이 나를 / 흰 독수리 깃으로 정화해주던 날 / 꿈을 꾸었습니다 / ... 산 속 깊은 곳에서 / 밤새 노래하고 춤을 추며 /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성인식을 치루고 또 치’룬다는 것은, 한 여성 시인의, 희생이 된 어린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대곡(代哭)이다. ‘파라고무나무 수액을 입힌 천으로 / 진즉 젖은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하였으니’의 이 ‘진즉’은 탁월한 정치적 언어다.
시인은 ‘파라고무나무’가 될 수 없었던 것을 꾸짖으면서 스스로가 ‘무(巫)’가 되었다. 희생자들이 흰독수리 깃으로 시인을 정화하고, 시인이 희생자들을 흰독수리 깃으로 정화한다는 이 중첩은 또 그 책상의 제일 위쪽에 있는 서랍일 것이다. 그 서랍은 당연히 점점 높아질 것이다.
생과 죽음을 우연히 마주치게 하는 것이 ‘무(巫)’이다. 두 가지 언어가 영적으로 하나가 되려고 한다. 나는 이 시가 비길 데 없이 대단히 아름다운 언어로 드리워져 있는 레이스 커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정말로 슬프다, 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 옷자락을 붙잡을 것 같다.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산 속 깊은 곳에서 / 밤새 노래하며 춤을 출 뿐’. 이것은 서랍 속에 있는 절실한 노래이며 맹세이다. 이 노래와 춤만이 우리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쪽으로 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섬만큼, 그 파도만큼 먼 곳에 있지만, 그 추억과 꿈은 그럼에도, 현재의 시인을 찾아오는 지금의 가을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시(詩) 자체가 아프다. ‘무(巫)’와 같은 그 책상의 전신인 오동나무가, 그 서랍이 ‘강신애’ 시인이다.
-고형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