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DRY 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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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14 03:02 조회5,12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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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DRY ICE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For real, I am a ghost. For the living such loneliness cannot exist.
—Sinking Lotus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There are times when, suddenly
I cannot be reminded of mother’s handwriting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and from the window of December
I feel that the time that exists
between myself and home
is critically ill.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Romance is like that.
This life will always be without comfort.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At the alley’s end, in the corner shop, I stick my face in the freezer.
Roaming through frozen food, without warning
I touch a piece of dry ice.
Time, frozen over, clings and brands my flesh.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What did this dry ice, coldly alive
and disappearing in a hot dust, finally wish to deny?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During the brief instant my finger touched
did the moment have a higher purity than my desire for desolation
and outlive all the time that has taken root inside my self?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I shudder as if the heat in my being has been completely snatched.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As if exposing all the light in the night sky of the city that lives inside my body
in the alley with mercury eyes, for a moment I shine.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I will die as a martyr in a time I will never live!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Wind like mud between the earth and moon drifts by
and today the air in the sky can’t rise—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Frost bitten from door to door
that air slowly flows
귀신처럼
like a ghost.
*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번역자 제이크 레빈 소개
제이크 레빈은 2010~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포함해 여러 장학금 및 수상을 한 바 있다. 두 권의 소책자(삭제의 문턱(The Threshold of Erasure, Spork 2010)와 빌뉴스 악령(Vilna Dybbuk, Country Music 2014))를 저술했다. 자신의 시, 번역물, 에세이 등은 보스턴 리뷰지, 루에르니카, HTML자이언트, 아트라스 리뷰지, 페이퍼 다츠 외 다수의 잡지에 실렸다. 그는 리투아니아어로 쓰여진 토마스 스롬바스의 작품, 갓/씽(God/Thing, Vario Burnos 2011)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등 한국현대시인의 시집을 다수 번역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비교문학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이다. 또 아리조나 투산 출판사인 스포크 프레스(Spork Press)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단평 한 자락
이 시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립감, 그리고 존재에 대한 성찰을 드라이아이스라는 소재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DRY ICE"라는 제목 자체가 이미 차갑고 멀어진 감정의 상태를 암시하며, 이는 곧 인간 내면의 깊고 어두운 부분을 탐구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시인은 고향과의 거리감, 어머니의 필체조차 기억나지 않는 상실감을 통해 개인적인 고독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보편적인 외로움으로 확대되며, 드라이아이스가 피부에 닿는 순간적인 느낌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표현됩니다. 드라이아이스가 차가운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열에 의해 사라지듯, 인간의 삶과 정체성 또한 순간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 시는 고대 시인 침연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외로움의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근본적인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이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부분임을 시는 말합니다.
"DRY ICE"는 삶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적인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게 합니다. 이 시는 차갑고 무감각해 보이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인간성을 상기시키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