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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外 2편 / 조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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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01 19:30 조회3,8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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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그것을 펼치자 괴괴한 날씨 냄새가 난다

페이지의 각도에 따라 조금씩 음영이 달라졌다

 

창백한 뺨을 내밀어 폐부 깊숙한 곳, 혹은

눈동자 너머를 훔친다

흡입한다

무겁고 권위적인 중세시대의 관 뚜껑을 닮은 표지

약간의 하품과 두통이 찾아온다

 

그곳에 드라큘라 백작의 새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먹구름이 커튼과 창 사이를 막 지나갈 찰나

백작의 눈이 백열전구처럼 켜지고

먼지 풀풀 날리는 고서의 한 문장이 송곳니가 되어 목덜미를 문다

 

이보게, 친구 난 죽었다네. 그러나 신이 영원의 시간에 하루를 더 덧붙여서 나를 저주했다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일세.*

 

고서의 살갗을 넘기면 투명한 벌레가 기어간다

보물처럼 반짝이며 서둘러 달아난다

 

주위는 숨이 멎고,

먼지처럼 조용히 머릿속으로

내려앉는 파편적 이야기들

아무도

고서에 기생하는 불멸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세기를 넘어서도 죽지 않는 비밀을

문필가들은 떨리는 입술로 발설하지만

비밀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질투하는 책들이

그의 오래된 문장을 표절하는 시간

 

어둠을 선호하는 그의 세계는 잠깐 사이에

검은 커튼을 온 거리에 펼쳐놓는다

 

캄캄한 어둠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그 속을 밤새 들여다본다

 

*밀로라드 파비치 소설 하자르사전에서 가져옴

 

- 2017년 미래시학 가을호

 

 

쉬기 좋은 방은 어느 계절에 있지?

 

늙은 새들이

방이 적다고 운다

겨울,

싹트는 발목들이 그곳에서 기다린다

 

자세를 바꾸면 봄으로 이사 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바람이 창을 그려

맨발을 붙인다

다음 장에서 만날 가능성에 기대본다

멀리서 날아오는 새들의 투정을 찢어 호주머니에 숨긴다

의심 없는 공기를 꽉 쥔다

 

얼어 죽은 고양이와 비를 맞고 죽은 목련꽃 중

어느 쪽이 더 마음 아프지

 

장례 객으로 거리에 서 있다

 

달이 천 개의 현을 뜯는다

불길한 구름 떼가 몰려오고 달 귀퉁이의 올이 풀린다

달이 줄어든다

오물 같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무엇을 삼키려 했던 걸까

 

빙판길의 이삿짐트럭

하나, ,

잠자지 않는 시계들의 야반도주

아직 녹지 않은 주소들이 실 뭉치에 걸려 자꾸 넘어지는 사이

달이 먹어치운 집들과

집이 먹어치운 이삿짐트럭

쉬기 좋은 방으로 가기 위해

몇 번이고 발목을 전지한다

 

 

- 2017년 시인수첩 봄호 발표 

 

 

 

책상으로부터

 

입체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것은 네모나고 납작한 감정

솔직함은 많은 옷을 입어서 오래도록 앉아 있다

 

아홉시 방향의 의자에 앉는다

인내심을 방석으로 깐다

기다린다

기다림의 평면으로 무엇이 날아오는 가

열두 시간을 거꾸로 돌렸더니 폐허가 생겼다

앙상한 뼈들이 서로를 부러트리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돌진하는 실패들

감정이란 돌이켜보건대

쓸데없는 헛발질이다

 

중세의 모필 가들이 왕성하고 지루한 페이지를 끌고 도착한다

결국 위대한 결말 속으로 죽는다

시간은 아직도 기류에서 표류 중

연필 속에 한 백 개쯤 필명을 넣어놓고 싶은 날이다

절실하기도 힘들고 솔직하기엔 구차한

허름한 생을 어떤 상징으로 기록할 것인가

새로운 오렌지와 고양이는 태어날 수 있을까

 

네모는

안개오랑우탕시리아분노레몬에이드아이스크림발레리지우개

너머의 모든, 연필을 부러트리고 다시

 

나는 두드리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책상이 네모난 이유를 생각하다가

질투하는 의자를 떠올린다

 

 

 

 

- 2017년 다층 가을호

 

   

 

조미희

 

- 2015년 시인수첩으로 작품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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