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고 있거든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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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11 21:35 조회3,99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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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거든
신용목
오래 비운 집
우편함에 쌓인 편지를 몰래 가져가서는
그 사연을 대신 앓는
소녀에게
모르는 곳으로부터 날아온 몇 줄 슬픔에 갇혀 밤의 미로 속을 걷고 또 걷는
소녀에게
가르쳐주마 나는 목숨을 끓여 슬픔을 정제하는 공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거든
그곳에서 생산되는 울음이 쌓여가는 창고와
컨베이어에서 돌고 있는 웃음을
아니면
목숨을 캐는 광산
안전모를 쓴 꿈이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어나오는 그곳을
나는 알고 있거든
네 하루가 작은 모래로 가득 찬 시계 같아서 한 번 떨어지면 바닥뿐인데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아무도 그것을 뒤집어놓지 않아서
그 다음 날
나의 집 검은 모래로 꽉 찬 유리창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날 다친 손으로
발목까지 끈을 매는 초록색 운동화와 분홍색 별 모양 헤드폰을 사려고
너는 계획하지만
분홍 별이 뜨는 초록 거리에서도
너는 혼자겠지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우편함 속의 편지처럼 그것이
네가 편지를 가져간 이유
나는 알고 있다
주인이 영원히 읽지 않을 사연을 주인이 영원히 읽지 못하도록
너의 밤에
너의 미로 속에
너의 몸에 가둬버린 그 슬픔을
그러나 너는 모르지
네가 아픈 이유
가르쳐주마 봉투를 찢었을 때 쏟아지던 모래의 내력과
후우 불면 흩어지는 활자들의 기원
초록 운동화를 신고 오는 밤과 분홍 별의 노래 속에 감긴 미로
나는 알고 있지
목숨이
꿈의 갱도에서 활자로 부서졌으므로
화차 바퀴의 모래시계로 뒤집히고 뒤집히며 네 사연을 채웠으므로
오랜 후
네가 쓴 편지를 네가 읽었으므로
너는 모르지
내게서
네가 네 운명을 훔쳤다는 걸
덕분에 나는 닫힌 공장 굴뚝의 긴 어둠을 막대처럼 뽑아 하루를 내리치며
폐광의 잠을 잔다
기어이 너는 모를 것이다 그날 네 작고 하얀 손이 무슨 짓을 하였는지
네 운명이 앞질러 되가져간
슬픔 덕분에
실직당해 몸 밖으로 쫓겨난 꿈 때문에
내가 일상이라는 죽음을 죽기까지 살게 될 테니
신용목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가 있다. 백석문학상, 노작문학상, 시작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