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다른 말로 말하면 / 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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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02 19:51 조회4,05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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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다른 말로 말하면
박남희
시는 완성되었을 때 시인을 떠나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시인을 버리지
시인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시인의 논리를 버리고
시인의 눈물을 버리지
버리고 버리고 더 이상 버릴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시는 바람에게 구름에게 새로운 말을 걸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잊힌 시인을 호명하듯
새들에게 절벽에게 말을 걸지
시인이 아주 보이지 않을 때
시는 비로소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스스로 시인을 찾아 나서지
시인의 눈물이나 논리의 반대방향으로
새로운 말의 질서를 찾아 나서지
거꾸로 말해도 바로들을 수 있는 귀와
그림자로 말해도 실체를 볼 수 있는 눈과
점자로도 눈물을 읽어낼 수 있는 손톱을
이리저리 찾아 나서지
그게 허공이라는 거야
종종 환청이 혼잣말을 하지만
날개는 완성되었다고 생각될 때 나무를 떠나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나무의 둥지를 버리지
둥지가 자라서 왜 울음이 되는지
새 속에 왜 시가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허공에 뾰족한 생각의 부리를 묻지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난 아침』이 있으며,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