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 외 1편 - 박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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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01 20:03 조회4,17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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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
독백이 독백을 잡아먹으며 밤이 깊어가네
뼛속이 바삭 마를 때까지 당신은 오지 않고
웅크린 몸에서 비린내가 나네
천 개의 현을 가진 악기라면 당신을 연주할 수 있을까
바닥을 다 뒤져도 발톱을 보이지 않는 토르소
기척 없는 당신은 어느 길에 골똘하고 있나
이슬도 별들도 바람도
연인이 되고 이웃이 되고 무덤이 되는데
당신을 한 올씩 풀어 끝없는 하늘을 엮네
눈빛을 꺼도 볼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부를 수 있는 이름
골방에 잠긴 내 영혼은 얼마나 섬세한 빛인가
촉수를 자르면 핏빛 죽음들이 송이송이 피어나네
푸른 녹이 떨어지는 문 앞에서
핏줄보다 많은 당신 이름을 썼다 지우네
손가락 지문이 사라지고
비린내가 조금씩 응축되는 줄도 모르고
태동
별들이 밤송이처럼 열려
숨을 쉴 때마다 빛을 뿜는다
밤이 떨어지는 토실하고 매끄러운 밤
알밤 같은 아기 하나 낳고 싶다
여자의 배는 날카로운 직선도 곡선으로 풀어내고
가시 속엔 동그란 방
가시 없는 아기가 자란다
별이 배를 톡톡 찰 때마다
하늘 한 쪽이 환해진다
밤송이가 몸을 구부려 태의 문을 열고 있다
나는
가시 박힌 오늘 밤에도
밤톨 같은 아기 하나
품고 있다
박천순
약력: 2011년 『열린시학』 등단. 시집 『달의 해변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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