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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여자-이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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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6-26 15:25 조회4,211회

본문

달의 여자

깊은 밤 홀로 깨어나 달과 만나네 나는 달빛으로 빚어진 여자, 이마에 부서지는 내 전생의 서늘함

 

달과 지구의 거리는 38만 4400킬로미터 광속거리로 1.3초

1.3초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너에게로 가는, 내 안에 너를 들이는, 눈꺼풀 지긋이 여닫는 데 필요한 충분한

 

1.3초란 내 질량이 공중에 머무는 동안, 아찔한 달빛 읽어낼 수 없어 의사는 폐경의 시니컬한 처방뿐 내 안의 달빛 보려하지 않아 달빛으로 빚어져 달의 사랑을 익힌 몸이 달빛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몸, 그 몸 다시 달빛 차오르는 동안

 

1.3초란 달 속의 토끼들 수없이 태어나고 계수나무 이파리 팔랑거리고 폴짝폴짝 귀를 늘리고 몇 번의 소풍을 다녀오고 마침내 달 밖으로 뛰쳐나와 알록달록 귀고리가 되고 하이힐 따각따각 달처럼 환한 이마로 달빛 속을 쏘다니는 동안

 

눈동자 깜빡 깜빡, 나의 하루가 건너가고 달의 하루가 건너오네 내 안의 너무 밝고 너무 뜨거운 기억들이네 늙은 여인의 독백 같은 식은 달빛이네 녹슬어 낯설어진 환영이 달빛 속에서 빙 빙 빙

 

내 병든 달빛 의사는 고쳐주지 않네 둥글게 차올랐다 손톱처럼 가늘어진 삭망, 고성능 망원경에 잡힌 크레이터의 실금들, 구멍 숭숭 초겨울 바람 같은 얼룩들, 깊은 밤 홀로 서 있는 그림자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네 달빛 아래 사라져간 폐점 폐교 폐선…… 폐字의 영상을 닮은 저 차가운 달

 

1.3초의 시간으로 와 닿는, 테두리에 갇힌 거뭇거뭇한 전생이 내 손등에 목덜미에 가슴에 막 둥지를 트는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수록

 

 

 

시평

신화의 공간을 꿈꾸는 시

                     홍일표

 

 

이 가을에 그녀의 손끝에서 태어난 ‘달빛으로 빚어진 여자’를 만납니다. 그 여자는 ‘전생의 서늘함’을 감지하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지요.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로 그려진 존재의 쓸쓸한 초상이 텍스트의 문면에 달그림자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1.3초는 달을 내 안에 들이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폐경의 적막한 시간입니다. 아무도 여자의 몸 안에 깃든 달빛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화자는 그 현실에 굴복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다시 신성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몸 안에 달빛을 채워 넣습니다. 달은 음(陰)이고 태양은 양(陽)의 세계이지요. 여자의 생식기는 달의 집입니다. 질(膣)은 곧 달(月)과 집(室)이 결합한 구조입니다.

 

달은 인간의 신체 리듬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생명과 재생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주기적 반복성을 띠는 사물이지요. 차고 이지러짐의 반복 순환을 통해 달은 생명 작용의 표상으로 인식되고 여성의 생리 또한 달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부터 한의학에서는 해와 달의 변화가 인체에 고스란히 재현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의 4연은 그러한 달빛의 재충전을 꿈꾸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달처럼 환한 이마로 달빛 속을 쏘다니는’ 시간이지요. 세속의 시간을 넘어 신화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화자의 몸짓이 돌올합니다. 그러나 한때 찬란한 빛으로 눈부셨던 것들이 이제는 ‘늙은 여인의 독백 같은 식은 달빛’이요 ‘녹슬어 낯설어진 환영’일 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물리칠 수 없는 현실이겠지요.

 

이제 화자에게 남은 일은 ‘고성능 망원경에 잡힌 크레이터의 실금들’과 ‘구멍 숭숭 초겨울 바람 같은 얼룩들’을 보는 일입니다. ‘폐字의 영상을 닮은 저 차가운 달’은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거뭇한 전생’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그림자요 삶의 아픈 한 단면이겠지요.

 

 

글/홍일표 시인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주간)

 

 

 

 

 

 

            *이미산 시인 

 

 

 약력 

 2006년 <현대시> 등단,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wy1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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