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이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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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18 16:35 조회4,01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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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이명덕
아이가 점 하나 그려놓고
그 점을 향하여 일정한 비율을 채워 가고 있다
그건 흰 달이 검은 달 속으로 들어가는 일
정오가 기우는 태양 속으로 침전하는 일
앞쪽은 날카롭고 뒤쪽엔 리듬을 달고
원근법에 집착하던 시절 있었지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의 속으로 사라지고
소실점 그 너머를 알고 싶었지
별 몇 개로 뜨고 지는 오늘이
동그란 일수도장처럼 어김없이 해로 떠올라
오늘을 꾹꾹 눌러 찍을 때
사라지는 매일매일의 채무들
네가 그리웠던 날의 점과
내가 팽개쳤던 날의 점 속엔
완전하게 다른 그림이 도착해 있었지
비로소 알게 되었지 사라지는 점은
살아지는 점이라는 것을
소실점 끝으로 들어가는
새의 우아한 비행을 상상해 보는 일
그 새의 눈으로 달려드는 바람의 원근법처럼
소실점은 내 걸음 위에 있었지.
-『스펑나무 신전』중에서
이명덕 시인
전남 화순에서 출생. 1997년 《현대시학》에 〈찔레〉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시집으로 『도다리는 오후에 죽는다』, 『그 여자 구름과 자고 있네』, 『스펑나무 신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