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대표시 /휘파람 외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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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1-31 05:50 조회2,95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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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아
이발소 방 씨의 오랜 폐렴도
정거장 버들가지처럼 흩날려버리고
제품집 순이의 고된 하루도
먼 하늘로 띄워 보내는
서럽지, 낮은 음성의 휘파람아!
패랭이꽃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초록 잎새들!
굴참나무 초록 잎새들 옹알이한다고?
고 어린것들 촐랑촐랑 말 배우기 시작했다고?
뭐라고? 벌써 입술 꼼지락대고 있다고?
조 작은 것들 마음 활짝 펴고 있다고?
그렇지 녀석들 환하게 웃을 때 되었지
고 예쁜 것들 깔깔대며 장난칠 때 되었지
그새 초여름 더운 바람 불고 있다고?
조 귀여운 것들 글씨 공부 꼬불꼬불 신난다고?
개미
모처럼 햇볕 좋은 날, 아파트 광장 한구석, 쪼그리고 앉아, 화단의 흙더미 바라본다 개미들이 일렬종대로, 먹이를 물고 기어간다 지루하게 일렬종대로, 한 가닥 서러움으로
문득 깨닫는 것 있다 사람의 역사도 저렇게, 나의 역사도 오늘 저렇게,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 먹이를 물고, 지루하게 일렬종대로, 한 가닥 서러움으로.
돌멩이 하나
아침 산책길, 돌멩이 하나 문득 발길에 채인다 또르르 산비탈 아래 굴러 떨어진다 저런저런…… 내 발길이 그만 세상을 바꾸다니!
달팽이 한 마리 제 집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풀섶 근처…… 이슬방울마다 황홀한 비명, 하얗게 열리고 있다.
사랑에 대하여
개나리 꽃밭에서
이 엄청난 개나리 꽃밭에서
샛노랗게
노오랗게 터져 오르는 꽃망울들이
사랑임을 배운다
저 자유가 사랑임을
퍼뜩 깨닫는다 들녘에서
들녘 논두렁에서
대궁 쫑긋하게 피워 올리는
독새 풀밭에서
저 굉장한 독새 풀씨들이
사랑임을
혁명의 한순간임을
배운다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을 거기 있게 하는 것도
저 씨앗들 속 조그만 생명임을
깨닫는다 미꾸라지
송사리 떼가 헤엄치며 놀고 있는
도랑물 길도 사랑임을
그렇게 하나임을
천지개벽으로 깨닫는다
진달래꽃밭에서
붉게붉게 죽었다 살아나는
봄 동산에서
부활을, 해방의 노래를 배운다.
라면봉지의 노래
그들은 날 버렸네 허투로
뒷골목 하수도 시궁창 속
쓰레기 더미와 음식 찌꺼기
시궁쥐들만이 내 친구였네
때로는 몇몇 비닐 조각들
어울려 함께 살기도 했네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는
석유기름 냄새가 났네 카드뮴ㆍ납 냄새가
주린 도둑괭이들마저
들이대던 혀 끝, 고개를 돌리는데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난 이렇게
봉두난발로 밀려다녔네
한 알 밀알은 썩어
무수한 새 생명 낳는다는데
나도 구절양장 내 창자가 썩어
무수한 새 생명 낳고 싶네
일러 내 이름 라면 봉지여
너는 왜 영영 썩지도 못하는가.
적막
적막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제 속에 동심원을 그리며 얼핏 멈춰 있을 따름이다
잠시 어금니 꽉 다물고 있을 뿐인 적막,
속을 뒤집으면 간이 녹아
벌써 거머리처럼 피가 흥건히 고여 있다
지금은 다만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거다 더는 피가 싫어
눈을 감고 있는 거다 수류탄의 마음을 하고
언뜻언뜻 숨죽이고 있는 적막,
적막은 누군가 다가와
안전핀 뽑아 세상 향해 집어던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다시 입을 열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야 말 적막,
한꺼번에 팍, 터지고야 말 적막,
오늘은 그냥 끙, 어금니 깨물고 싶은 것이다
고개 돌려 벅찬 가슴 다잡고 있는 것이다.
섬
스스로의 生 지키기 위해
까마득히 절벽 쌓고 있는 섬
어디 지랑풀 한 포기
키우지 않는 섬
눈 부릅뜨고 달려오는 파도
머리칼 흩날리며 내려앉는 달빛
허연 이빨로 물어뜯으며
끝내 괭이갈매기 한 마리 기르지 않는 섬
악착같이 제 가슴 깎아
첩첩 절벽 따위 만들고 있는 섬.
희망은 저 혼자
희망은 저 혼자 외따로 서 있다
알싸한 몸매, 환한 얼굴로
저기 숲 속 오솔길 가
상냥한 목소리 다듬고 있다
그대 애타는 마음 죄 외면한 채
희망은 저 혼자
누군가를 향해 웃고 있다
예쁜 몸맵시 자랑하고 있다
숲 속 오솔길 가
아름다운 저택이 있고, 정원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
풀장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우유빛 벤치가 있고
거기 벤치 위에 앉아
희망은 저 혼자
누군가를 향해 황홀해 하고 있다
우아하게 속삭이고 있다
마침내 희망은
벽난로 옆 쭈그려 앉아 울고 있다
불꽃은 피어올라
자꾸 늙어빠진 할망구의 얼굴로 흔들리는데
희망은 저 혼자
거실 꽉 채우고 외로움에 지쳐
눈물 흘리고 있다
세월 탓하고 있다
희망이여 참으로 천한 계집이여
너, 내내 혼자 그렇게 울고 있어라
마구 치마끈 풀어헤친 채.
연탄재
燒身供養이라더니……
제 몸 허옇게 태워,
사람들 밥 짓다가 스러졌구나
부처님 마음으로
아직도 미아6동 산동네,
온통 끌어안고 있구나
한 토막 숯의 마음조차
죄 벗어 던진 채.
청개구리와 민달팽이
마곡사 선방 앞에 선다
자미나무 검붉은 꽃잎들 사이로
청개구리 한 마리 초싹대며 뛰어오른다
얼기설기 나무판자 엮어 세운
선방 외짝 문 앞에는
숯과 고추를 끼워 만든
금줄 처져 있다 굵은
통대나무들 가로뉘어 있다
‘참선 중입니다’ 먹글씨로 밑으로
엉금엉금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고 있다 촉수를 늘여
언젠가는 이 선방
죄 더듬으리라 마음먹는 사이
오조조, 자미나무 꽃잎들
바람에 진다 민달팽이의 발원도
흙 길 위로 진다 마곡사
지쳐빠진 선방 앞
늙은 매화나무 등걸을 밟고
언젠가 나도 청개구리 한 마리로
초싹대며 뛰어오른 적이 있다.
무인도
무인도는 밤새 이글대는 불덩어리로 앓았다
너무 뜨거워 그만 바닷물 속으로
제 몸 담가버리고 싶었다 눈감고 편안히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처음 제 몸
물 밖으로 밀어 올렸을 땐
자신이 일구는 풀과 나무가
신의 축복인 줄 알았다 그런 마음으로
제 몸 가득 숲을 키우며 무인도는
새와 짐승들 불러들였다 天命을 아는
시간을 살고 나서야 무인도는
제 몸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마며 목덜미를 덮는
괭이갈매기들의 저 더러운 똥들이라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으니 누구 하나
씻어 주질 않았다 냄새나는 제 마음이 싫어
무인도는 밤새 이글대는 불덩어리로 앓았다.
우울
우울은 지금 제 가슴 쫘악, 찢어대고 있다
책상 위에는 복잡한 서류들 마구 흩어져 있거늘, 그것들 무어라 자꾸 지껄여대고 있거늘,
거기 엇갈려 포개져 있는 두 손 위, 우울은 제 머리 칵, 처박고 있다
21층 드높은 사무실
어쩌다 보니 저 혼자 내팽개쳐져 있는 우울은 시방 이빨 앙다물고, 아그그 신음소리 내고 있다
얼굴 찡그린 채 눈물 흘리고 있다
참을성 없는 놈이라니!
우울은 잔주접이나 떨고 있는 저 자신이 싫다 까짓것 청명과 한식 사이거늘, 도갑사 산벚꽃처럼 타오르면 그만이거늘,
화르르 흩날리면 그만이거늘……
우울은 지금 제 팔다리 쫘악, 찢어대고 있다
책상 위에는 금방 터질 듯한 은행의 통장들 함부로 흩어져 있거늘, 통장들 뭐라고 거듭거듭 지껄여대고 있거늘
거기 엇갈려 포개진 두 손 위, 우울은 제 얼굴 칵, 처박고 있다
앙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우울은 너무 싫다 그만 세상 하직하고 싶다 산벚꽃처럼 가볍게 몸 흩날리고 싶다
바람은 그걸 알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거늘!
빨래하는 맨드라미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라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의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접는 의자
아무데나 불쑥 제 푹신한 엉덩이 내밀어
사람들의 엉덩이 편안하게 들어앉히는 접는 의자!
사람들의 엉덩이 앉았다 떠날 때마다
접는 의자의 엉덩이 반질반질 닦여진다
사람들 다 돌아가고 나면 엉덩이 들이밀고
사무실 한 구석에 우두커니 기대 서 있는 접는 의자!
더는 아무데나 함부로 엉덩이 내밀 수 없어
세상 어디에도 그에게는 제자리가 없다
제자리 없어 더욱 마음 편한 접는 의자!
엉덩이 폈다 접으며 그는 하늘에 가 닿는다.
매화원에서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
매화원, 꽃송이들만 앞 다투어 피고 있네
보게나 꽃송이들로
피어나는 나일세
꿀벌들, 윙윙대는 날갯짓도
때로는 나인 적 있네
그렇네 꽃향기로
번져 가는 나도 있네
매화꽃, 꽃진 자리
오물오물 알져 오르는 저 열매들!
열매들로 뽀얗게 자라
푸르른 하늘, 흰 구름
제 속에 가득 담기도 하네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
바람으로 물결로 떠 흐를 뿐이네.
첫눈 아침
첫눈 아침, 바윗돌처럼 단단한 한기 품고
시리게 얼어붙은 웅덩이 속 헤매고 있다
아침 첫눈, 하얗게 번져오는 햇살 품고
막 눈 뜨는 시냇가 버들개지 위 떠돌고 있다
너무 추워 큰 귀때기 쫑긋대는 산노루의 걸음으로
첫눈 아침은 내일 아침에나 온다
너무 시려 빨간 코끝 벌룽대는 꽃사슴의 걸음으로
아침 첫눈은 모레 아침에나 온다
내일 모레, 내일 모레, 내일 모레……
반야심경처럼 외워 보는 꿈
모레 글피, 모레 글피, 모레 글피……
법구경처럼 외워 보는 희망
버석대는 명아주 꽃대궁을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첫눈 아침이 있다
뽀얗게 껍질 벗는 버짐나무 줄기를 걷어차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침 첫눈이 있다
그것들, 오늘 여기 있지 않아 마음 환하다
그것들, 지금 여기 있지 않아 가슴 벅차다.
떠돌이의 밤
오랫동안 외지를 떠돌다가 돌아온 밤이다
긴 장마의 끝, 가슴까지 눅눅해진 밤이다
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
저도 외로워 동그랗게 몸 오므리며 떨고 있다
담배 연기로 만드는 따뜻한 도넛들!
하얗게 피어오르며 식욕을 돋우고 있다
몸보다 먼저 침대 위에 눕는 마음들!
자갈더미라도 밟은 듯 서걱대는 소리를 낸다
가슴속 붉은 해당화 열매 저 혼자 붉는 밤이다
버리지 못하는 것들 너무 많은 밤이다.
삼베빛 저녁볕
삼베빛 저녁볕, 자꾸만 뒷덜미 잡아당긴다
어지럽다 아랫도리 갑자기 후들거린다
종아리에 힘 모으고 겨우겨우 버티고 선 채
흐르는 강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산언덕을 덮고 있는 조팝꽃처럼
마음 몽롱해진다 낡은 철다리조차
꽃무더기 함부로 토해 놓는 곳
간이매점 대나무 평상 위 털썩, 주저앉는다
싸구려 비스킷 조각조각 떼어먹으며
따스한 캔 커피 질금질금 잘라 마신다
초록 잎새들, 팔랑대는 저 아기 손바닥들
바람 데려와 코끝 문질러댄다
쿨룩쿨룩, 삼베빛 저녁볕 잔기침하는 사이
강마을 가득 들뜬 발자국들 일어선다
싸하게 몸 흔들며 피어오르는 철쭉꽃들
벌써 물속의 제 그림자 까맣게 지우고 있다.
이은봉(李殷鳳): 1953년 충남 공주(현, 세종시)에서 태어나 숭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삶의 문학》 제5집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등단했고,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바람, 은여우』 등이 있고, 시조집으로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평론집으로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 『한국현대사의 현실인식』 등이 있다. 한성기 문학상, 유심 작품상, 한남문인상, 충남시인협회상, 가톨릭 문학상, 질마재 문학상, 송수권 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