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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가는 길/ 이 령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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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3 04:35 조회4,1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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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가는 길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                               구광렬

 

   1    무대 뒤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소리, 그 신비로운 서주(序奏)에 창 밖 가로수 잎맥들, 팽팽하네    쌀 튀밥 같은 이팝나무, 보릿고개 시절 눈으로만 삼키던 미미(美味),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날들, 저만치 매달려있네

 

   트럼펫 팡파르, 차창에 내려앉는 꽃잎들, 27번 국도의 오르막은 한껏 축제 중이라네    못물이 넘실대는 논바닥이 부드럽고 스케르초와 부드러운 왈츠 덕에 차창풍경이 경쾌하네 오케스트라와 팀파니가 하행 모티브를 강하게 주고받으니, 저 모퉁이를 돌면 곧장 풍성한 여름과 만나겠네   2    현악기 하모닉스로 풍경이 술렁이네 흔들리며 밀려가는 농부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농기 대신 악기를 들쳐멘 듯하구나 큰북을 이고 가는 양 저 노인네, 차를 세우고 손을 빌려주고 싶지만 저세상 사람 같네 막 겨울이 야산 끝자락에 회색의 입술자국을 남겼네

 

   뻐꾸기 노래하니 울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기쁨이 올 것이니’* 축제의 노래, 고조되지만 애달프게 붉어져만 간 나의 계절, 차창 밖 나무둥치가 돼버린 난, 지난날 뿌리혹들을 아파하네    3    주암호반도로를 달린다네 수면이 파르르 깨져있네 나무들이 호수 위로 찢겨져 내리누나 보리수의 선율을 지닌 트리오, 팀파니의 리듬을 타고 저현이 어둡구나 차창 밖은 봄이건만, 차창 안은 겨울이라네 룸미러에 성에가 끼고 마디마다 겨울이 쌓이네 창문을 내려보지만 날개 잘린 겨울은 쉬 빠져나가질 않는구나

 

   논바닥, 깊게 패인 손금처럼 물속 검은 고랑이 출렁이네 여기저기 모가 꽂히면 저 고갯마루도 말랑해지리라 거칠고 활기찬 스케르초와 유연하고 사랑스러운 트리오가 대비를 이루니, A장조의 렌틀러에 오보에가 대선율에 얽히누나    4    d단조, 팀파니의 희미한 연타에 등장하는 더블베이스 선율, 뒤이어 등장하는 카바레 풍의 밴드 선율, 두 계절 간의 벽이라네    호수 끝 자락쯤, 떠나지 않은, 아니 떠날 수 없었던 철새 한 뭉텅이, 플라맹고 자세를 취하누나 그대 함께 언약한 내 사랑의 고향, 나 잊질 못하네, 그 아름다운 Annie Laurie를 위해서라면 나, 기꺼이 목숨을 바치리라’**바이올린소리에 첼로가 묻혀버리고 4도 하행 음정이 저만치 들려오네

 

   영화스크린 속의 봄, 관람객으로서 맞는 봄…… 꽃향기, 피 냄새, 밥 냄새, , 냄새도 맡지 못할 내 아버지의 겨울 속 내 어머니의 봄    풀어지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애처롭네 멀리 송광사 팻말이 보이고 조계산 끝자락이 막 눈에 들어오네    5    2/2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인 포르티시모 총주에 깜짝 놀라네 기어봉을 움켜쥐어보지만 연주자들의 손가락, 입술, 어깨, 지휘자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온몸을 간질이고 문지르네    산이 통째로 차 안으로 밀려오네 계곡물이 스미고 칡덩굴이 핸들을 감아쥐네 차를 길섶 모퉁이에 세울 수밖에 없네

 

   차창 밖 편백나무도, 배롱나무도, 여전히 옷고름을 물고 있는 송광사도 다들 예쁘기만 한데, 천하의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곡을 붙였던 그가 괴로워하네 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 그가 대지 위에서 눈물을 보이네 안과 밖, 불이문(不二門)이건만 지금 후광 가득 문설주 아래 내 나이 또래인 그가……

 

* 멕시코 민요 Cielito lindo(내 예쁜 사랑)의 한 소절** 스코틀랜드 민요 Annie Laurie(애니 로리)의 한 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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