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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서/ 위자보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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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1-31 06:47 조회35,8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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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자보드
 
 
  나는 몇 달치의 노역을 지불하고  
  어린 새를 사들였다
  새는 거울 속에 틀어박혀 울다가
  검은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움이 미로를 헤매다 늑골에 잔뿌리를 내렸다
  거울 속에 남아 있는 
  솜털 같은 온기
  궁금한 장면에 대해
  ‘잃어버린 시간들’이라 썼다가 지우고 ‘사랑했던 시간들’이
라고 썼다가 지우고
  ‘사랑하는 시간들’이라고 쓴다
  사랑은 완성되어가는 것이지 완성된 것은 아니라 사랑 앞
에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것은 ‘잔인한’이라는 것이다
  식욕을 잃은 나는
  어둠을 지배하는 악령의 지시를 따르듯
  촛불을 켜고
  흰 종이에 말판을 그린다
  Yes, No  
  사방위四方位에 쓰고
  “나는 당신의 친구이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주문을 건다
  빨간 펜이 잠든 혼령을 더듬거리더니
  No 쪽에 멈춘다
  촛불이 떨고 있다
  여기서 게임을 끝내면
  내가 다치거나 주변사람이 다친다는
  정설이 말판을 뒤엎고
  닫힌 창문을 복기한다
  악령을 접신했다는 신호일까
 


 자각몽 1

    

  새벽은 기도가 잘 통하는 시간
 
  선잠의 끝에 매달린 카나리아
  꿈의 변곡점을 넘나들며 D단조의 현을 누른다
  저음과 고음이 한꺼번에 울린다 
  책에서 도망친 ‘좀머 씨’ 헐레벌떡 뛰어간다

  국경은 봉쇄되고 
  병원은 폭격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다
  병실을 지키는 램프 하나
  짓궂은 농담 같은 끔찍한 기억을 지우려고 서정적 풍경을 떠올린다
  
  망각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데
  분화되는 기억들
  하루에 만 명이 죽고, 삼천 명이 난민이 되고
  
  카나리아가 쉬지 않고 우는 것이나, 좀머 씨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나
  목을 죄어오는 불안을 지고
 
  사제들은 들메끈을 고쳐 매고 성배를 찾아 순례길에 오르는데
  감람나무 그늘 밑에 난장이 열린다
  방언들이 끓어오르고
  반군들은 겁먹은 소녀들을 사고팔고 있다
   
  폭음이 몰려와
  지평선을 무너뜨린다 
 
  꿈이 꿈을 하나씩 넘기며 꿈을 벗어나려 해도 꿈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도르르 말린 꿈이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굶주린 눈빛,
  이불 속을 파고든다
  천장의 야광별 부르르 떤다
 
  가위 눌린 집
  벽난로는 식어있고
  무너진 담장은 눈치 없이 넝쿨장미를 피워 올린다
 
 


난쟁이별1
 

  철거 명령에 묶인 집에서  
  남은 날이 하루뿐인 미래를 꺼낸다
  어두운 부분을 빗자루로 쓸어낸다 
  빗자루를 타고 올라온
   조울증  
  웃고 울고
  내 몸에서 빠르게 번식을 하는데
  최면술 같은 몽환 속으로 미끄러진다
 
  도비왈라 아버지
  전생의 죄를 씻어내고 후생에 올 더러운 길道을 닦아내듯 강물에 대물림한 운명을 풀어놓고 치댄다
  
  목에 오지통을 건 아이들   
  무지개를 따러 금단의 숲에 간다
  숲은 그늘을 키우는지
  금세 해 떨어진다
 
  까악까악 음산한 울음이 마을을 배회한다 
 
   조울증의 기원을 추적한다
  나른한 우울 
  내 몸을 숙주 삼아 영원히 눌러앉을 기세다 
 
  우울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만
   손 마주잡고 웃어줄 사람이 없다
 

 

 


자각몽 2

 

 

 넝마를 걸친 그림자를 끌고
 못질된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한다
 눈앞에 신성한 강이 열린다
 때 묻은 발을 들여놓는다
 투명한 물방울들이 달라붙는다
 강아지가 잠을 물고 강기슭을 어슬렁거린다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나를 떠나보낸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어귀에 솟대를 세우고
 제물로 바칠 새를 찾아 나선다
 사냥꾼들이 꾸려진다
 당황한 새들은
 죽은 척 페루로 피신한다
 새가 떠난 마을은 안개를 증식하고 있다
 겹겹이 쌓인 안개를 뜯어내고
 마지막 남은 퍼즐 조각을 끼어 넣자
 그림이 완성되고
 “그대가 오길 오래 전부터 기다렸오”
 인자한 목소리가 울린다
 종루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환희의 종소리 들어앉힌다
 종소리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간다
 새들이 거기 있었다

비밀수첩 2
      

나비族들이 암술에 꽃가루관을 꽂고
분탕질을 한다

1의 봉오리 쓰러지고
2의 봉오리 쓰러지고
3의 봉오리 쓰러지고
    (……)         
33의 봉오리 쓰러지고   

 

4의 봉오리 
간신히 일어나 퉁퉁 불은 다리에 힘을 준다
통나무처럼 감각이 없다
엉금엉금 기어가 위안소 밖을 내다본다

나비族들 바지춤을 잡고 차례를 기다리는데
일몰을 흔드는 뱃고동소리
섬을 한 바퀴 돌아와 적막을 끌고 가는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계곡 저 아래
꽃으로 와서 제대로 피지도 못한 시신들
피맺힌 가슴에 박힌
칼날과 총알, 살기를 품고 있다
탈출, 임신, 매독
금기어들
한 뿌리로 연결되어있다

잊혀진 혼백들 
바람이 되고
새가 되어
귀환을 서두르며 날갯짓을 한다
 

타인의 배후1

 

 1.
  달이 태양을 삼키는 날 그는 첫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그 시각에 태어난 사람의 사주팔자는 살煞이 끼었다고 한다

  타고난 살煞을 퇴치하려면
  천 년에 한번 우는 가릉빈가 그 깃털을 문설주에 걸어야 한다 가장 길고 눈부신 것으로
 
  2.   
  그는 말을 할 때
  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도치법을 쓰기도 하고
  거친 욕설로 구두점을 찍기도 하는데 구두점마다 격음이 새어 나온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격음들
  서로 섞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격음은 깊숙이 잠복한다

  3
  백악기에서 무지개를 빌려와 객토를 하고
  땅고르기를 끝냈다
  파종을 해도
  때 아닌 침수가 되거나
  때 아닌 폭설이 내리거나

  4.
  목에 십자가를 걸자
  으스스한 소음이 사라지고
  난청도 순해진다
  이것을 우연이라 해야 할까 미신이라 해야 할까
 
  눈앞에 알 수없는 징후가 나타나도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운명은 환불이나 교환 불가능하기 때문에


 


 김명서 :

시사사로 등단​

첫 시집으로 『야만의 사육제』로 세종우주도서에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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