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사춘기는 빨강이었고 내 엄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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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11-07 13:40 조회1,58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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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시인
신작시
사춘기는 빨강이었고 내 엄마는
희고 검은 색을 선호하는 소년은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시크하게 취향을 말하지
휴대폰 게임을 하느라
자정이 넘어도 올빼미는 깨어 있지
허락받고 방문을 열라는 소년은 멋쟁이
비정한 건지
다정을 위장하는 건지
심연을 알 수 없는 빙하처럼
미끄러지는 소년을 보며
돌덩이를 가슴에 매단 엄마는 서운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서늘해지고
질척거리지 않는 대화체를 연구하는
엄마는 불안한 구름
Off White 티셔츠 등판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소년은 떠나고
미간에 주름이 진 엄마는
낡은 의자에 앉아 저녁을 기다린다.
Puberty was Red and My Mom
The boy who prefers white and black
Like a cold city man
Says his taste in a chic way.
Playing mobile phone games,
Even after midnight the owl stays awake.
Fashionable boy scolds his mom
To get permission and open his door.
Is he ruthless or
Is he disguising his affection?
Like a glacier whose abyss is unknown,
Watching the son slide
Mom feel sorry for the stone hanging on her chest
The feeling of love is getting colder,
Studying non-smoky dialogues,
Mom is an anxious cloud.
The boy followed the arrow painted on the back
of an Off White T-shirt and he left.
Mom with a wrinkled forehead
Sits on an old chair and waits for dinner.
근작시
욕조의 마네킹 외 1편
욕조는 나른하다
햇살이 비치는 물속
수면 위로 나비가 앉는다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알몸이 피어나고
젖은 목소리가 들려와요
저 편에서 느리게 느리게
여기는 어디예요
당신 귓속이지
목소리가 목소리를 듣는 거지
욕조를 기울이면 두 발이 떠오르고
귀를 기울이면 쏟아지는 빛의 나비들
잠겨있는 몸,
마네킹은 피어나는데
눈동자는 흐려지는데
단추를 풀면 우리도 검은 플라스틱이 될까
에덴을 떠난 이브처럼
천둥이 쳤다
번쩍, 금이 간 얼굴은 빛나고.
당신이라는 은유
귓속에서 태어난 바람처럼
한 손으로 나뭇잎을 스치고
한 손으로 당신 손을 만지며
두 개의 자전거가 달린다
유월 햇살이 하얀 셔츠의 깃을 비추고
호숫가의 바람에 모자가 날아간다
당신의 입술을 만지는 기적은
곤충도감에서 사라진 나비가
어느 날 기적처럼
담장에 핀 장미를 만나는 일이지요
당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은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전생에 만난 별로 돌아가는 여행이지요
스타벅스와 여름의 먼지 사이
아이들의 풍선 사이
입가의 미소가 햇살에 반사될 때
선글라스를 쓴 호수가 되고
커피를 마시는 나무가 되고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사과
자전거 바퀴가 햇빛 사이로 달린다.
어긋남의 감각- 김혜영의 시세계
글 구모룡
김혜영 시인의 시는 낯설다. 단지 새롭게 쓰려는 낯설게 하기의 의도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상징 질서에 복속하는 자아와 소망하는 자아가 만드는 간격이나 내면과 꿈의 언어가 기술하는 이미지가 새롭고 기괴하다. 그는 「욕조의 마네킹」의 시편처럼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금을 만들고, 서로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병치하고 치환한다. 또한 주관적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는 주지적인 시적 태도를 일관하는데, 이는 서정적 자아보다 페르소나의 변주를 선호하는 발화로 나타난다. 시인은 자아를 드러내기보다 숨기거나 감추는 시법을 선호한다. 그래서 일인칭 경험적 자아를 따라 시를 읽는 관습에 익숙한 독자를 당혹하게 만든다. 시편을 따라 읽으면서 시인의 의식 지향과 변화의 지평을 찾으려는 비평의 기획을 차단한다. 반서정주의가 가져다주는 곤경이라 할 수 있다.
반서정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아와 언어에 대한 회의주의와 관련이 있다. 『다정한 사물들』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 「엔딩 게임」의 결구가 말하듯이 “스쳐가는 우주의 그물 안에서/무심히 지나가는 환영들/당신도 나도 아닌 시간의 유령들”(「엔딩 게임」에서)의 세계에서 불확실한 삶과 불확정적인 의미를 반복하며 존재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앞선 것에 대한 거듭된 부정은 언어 회의와 주체 회의라는 두 가지 벡터를 지닌다. “언어 너머의 세계”(「시계는 사과나무의 사랑을 모르고」에서)를 동경하고 “어디에도 없는 나”(「오슬로는 투명해」에서)를 찾아서 방황한다. 이와 같은 회의주의의 벡터가 시인의 시법을 간섭한다. 환영과 부재의 맥락을 형성하며 보이는 이미지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실재라는 대립의 결합이 가능하다. 드러남과 감춤, 보임과 보이지 않음은 김혜영의 시를 구성하는 주된 얼개이다. 이들의 어긋남이 시작의 연속성을 이루는데 낱낱의 시편을 시인이 만난 사물의 이미지가 구성한다. 따라서 자기표현을 통하여 시적 지평을 개진하는 과정보다 시인이 수행한 상상과 재현의 대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개별 시편은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형상 형태에 가깝다. 시인이 선택한 사물과 이미지, 그리고 이를 말하는 태도를 통하여 시적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김혜영 시인이 그려낸 이미지들은 어긋나 있다. 이는 사물이 유기적인 연속성과 동일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생각과 거리가 있다. 시집에서 가장 먼저 놓여 있는 「튤립」은 시인의 지각을 잘 보여준다. 기하학적인 형태로 조성된 공원에 피어 있는 튤립과 그 사이를 지나거나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빛은 변화하고 바람은 유동한다. 다채로운 움직임이 활발하다.
공원은 기하학이다//두 손은 다정하고/공사장 인부의 안전모가 빛나고//먼 네덜란드를 떠나온 튤립 구근은/부산 시민공원 입구에 피어나/나비 떼처럼 흔들린다//카메라 렌즈에 비친/노란 튤립 사이로/수녀의 검정 치마가 흔들린다//은은히 불어오는 예감에/입술은 공기처럼 부풀어 오르고/튤립 봉오리는 미풍에 고개를 흔든다//벤치에 앉은 노인은/아내의 손을 쓰다듬는다/감미로운 속삭임이 번지는 저녁//곁에 가만히 다가온 몸짓/누구일까,/계절을 기억하는 나선형 우주는 음악을 켜고//우리가 사랑한 붉은 튤립이/흔들린다, 기하학적으로(「튤립」전문)
이 시에서 ‘공원은 기하학’이라는 첫 연의 구절은 돌연하다. ‘부산 시민공원’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 ‘기하학’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물론 주된 시적 대상은 표제의 위치에 있는 ‘튤립’이며 결구에서 ‘기하학적으로’ 흔들리는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수미상응의 구성을 이룬다. 공원 안의 다양한 사물들의 움직임은 ‘튤립’을 전경으로 삼는 배경이다. ‘공사장 인부의 안전모’, ‘수녀의 검정 치마’, ‘벤치에 앉은 노인’ 등이 그렇다. 2 연의 ‘두 손’이 ‘아내의 손을 쓰다듬는’ 노인을 지시하는지 아니면 마지막 연의 ‘우리’를 지칭하는지, 다소 애매하나 후자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우리’의 시선 이동이 시의 전개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주된 흐름은 흔들림이라는 운동 이미지이다. 이러한 흔들림이 증폭하는 위치에 5 연이 있다. ‘은은히 불어오는 예감에/입술은 공기처럼 부풀어 오르고’라는 구절이 말하듯이 생동하는 에로스의 실감은 6 연에서 노인의 감응으로도 발현한다. 마침내 7 연에서 ‘튤립’이 ‘계절을 기억하는 나선형 우주’로 비유되면서 숭고로 격상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에서 흔들림은 에로스의 감응으로 상승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기하학과는 어긋난 움직임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를 배치하고 결합한다. 일종의 그로테스크, 일종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정지와 동작, 사물의 생동하는 관계와 기하학적 형상이 병합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양상은 「딸기를 먹는 일요일」에서도 변주된다. “딸기는 에로틱하지/딸기는 삼각형이지/눈 안에 모래알갱이가 날리고”와 같은 진술을 들 수 있다.
「튤립」이 말하듯이 김혜영은 이질적이고 반대되는 사물의 공존과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변화, 단절, 부정이라는 현대사회의 양상에 상응하는 미메시스이다.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현대성은 이미지의 병치와 치환, 그로테스크, 아이러니, 알레고리와 같이 주지적인 양식을 동반한다.
「욕조의 마네킹」처럼 시인의 지성은 다양한 시적 대상으로 확장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은 물론이고 회화와 음악, 독서와 여행의 경험은 외부를 향한 시적 관심의 대상으로 포획된다. 「플라스틱 인어」는 “해운대 동백섬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다. 낭만적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플라스틱 관계를 풍자한다. “녹조가 번지는 해변에서/에로틱한 인어는 불멸을 노래해요”라는 결구는 의미심장한 역설을 품는다. 영화와 극장, 감독과 관객을 매개로 성적 판타지와 성 정치를 말하기도 하고(「변태적인 R과 마조히즘 취향을 가진 S」에서), 프로이트의 환자를 시적 모티프로 소환한다(「까마귀」). 모두 무의식과 환상, 현실과 꿈, 의식과 욕망, 동일성과 비동일성, 이중성과 분열 등과 같이 어긋나는 주체와 언어의 문제를 말하기 위함이다.
현대성의 핵심은 변화이다. 현대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면서 자율적인 영토를 더 확장하고 있다. 김혜영 시인은 현실과 상상을 가로질러 현대적인 새로움의 이면을 해부하고 압류되고 있는 미래를 염려한다. 그가 지닌 어긋남의 감각은 ‘맹그로브 숲’과 같은 어떤 실재의 세계에 당도하려는 강렬한 부정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을 뒤집는 오랜 전통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새로움의 가치를 생각한다. 어긋나면서 다시 서로 결합하는 의미의 열린 지평을 개진함으로써, 김혜영의 시학은 현금의 시단에서 중요한 개성임에 틀림이 없다.
구모룡/ 평론가,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1959년 경남 밀양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비평집『감성과 윤리』, 『폐허의 푸른 빛』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