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본문 바로가기
K-POEM 케이포엠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한국의 시와 시인들

K-POEM의 작품들
이달의 시인

K-POEM 케이포엠

이달의 시인
신인추천 작품상
수상특집
  •  HOME
  •   >  
  • 이달의 시인
  •   >  
  • 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수평선을 덮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3-05 12:33 조회2,707회

본문



 김명인, 수평선을 덮다읽기
                                        장석주

수평선과 그 너머를 상상하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수평선의 가능성을

너는 타진해본 적 있느냐?

좌우간에 세울 자리가 없어서

시야 위로 한 획이듯

수평선은 가로눕는다, 저렇게 많은

결심들 일순에 꺼뜨리며

그 무슨 방심같이 시야를 가둔다

지친 몸을 끌고

너머로 가려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가고 있거나

꺾여버린 돛대들,

책을 펼치면 줄글 사이로 그어놓은

그의 문장, 요약적이다

아주 먼 곳까지 끌고 가려던 것,

어둠이 슬그머니 가라앉혀버리는 것

 

김명인의 시 수평선을 덮다는 바다와 수평선을 노래한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미개척지이나 황무지이고, 선원에게는 재앙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사악한 삶의 자리다. 바다는 때로는 예측할 수 없이 요동치고, 때로는 펼쳐진 비단처럼 잔잔하고 아름답다. 바다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허만 멜빌은 저 유명한 해양소설 모비딕에서 언제까지고 영원히,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바다는 인간을 모욕하고 살해하고 아무리 위풍당당하고 튼튼한 함선을 만들더라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한다는 느낌이 반복되면서 인간은 바다의 원초적인 완전한 공포감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오직 자신의 자비, 자신의 힘만으로 바다는 스스로를 다스린다.”, “주인 없는 대양이 지구를 뒤덮고 압도한다. () 바다는 스스로를 잡아먹는다. 바다의 모든 짐승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천지개벽 이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벌인다.”라고 썼다. 바다를 관조하는 자에게 바다는 아름다움의 대상이지만 바다에 뛰어든 자에게 바다는 공포 그 자체다. 인간이 바다를 장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바다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바다에 매혹당한 시인이 많고, 따라서 바다를 노래하는 시는 수없이 많다. 가장 최근에 읽은 바다에 관한 시는 세상 어딘가에 바다라고 불리는 익사자들의 거대한 무덤이 있다고 들었다”(신용목, 얼음은 깨지면서 녹는다)라는 구절이다. 내 기억에 남은 인상적인 것은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바다다. 이 시는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올바른 자 정오가 여기에서 불꽃을 짠다./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신들의 고요함에 던지는 오랜 시선/오 사고(思考) 다음에 오는 보상이여!”라고 시작한다. 바다는 비둘기들이 노니는 고요한 푸른 지붕, 정오가 불꽃을 짜는 장소, 사고(思考) 다음에 오는 아름다움의 보상이다. 폴 발레리는 바다를 한 권의 책으로 상상한다. 그랬으니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펼쳤다 접는다.”거나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이여!”라는 구절이 가능했을 테다.

 

수평선을 덮다에는 수평선을 끌어온 시이되 바다에 관한 직접적인 언술이 없다. 단지 수평선이라는 두 번의 언급, “꺾여버린 돛대들로 이 시가 바다를 노래하는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시인은 세계가 아주 오래된 거대한 바다이고,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상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평선은 가로 누운 일획이다. 그 질감과 색과 깊이를 삼킨 채 일획으로 꿋꿋한 그 경계로 하늘과 바다가 나뉘는데 수평선을 보는 자의 시선은 거기서 끝난다. 주체의 시선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갈 수가 없다. 이 시는 우리의 눈길이 가 닿지 않는 수평선 너머에 대해 말한다. 너머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보이지 않는 대상은 보이지 않음으로 신비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한다. “아주 먼 곳은 보이지 않는 장소이다. 세상은 수고와 시련의 장소, 치욕과 환멸의 장소이기 때문에 현실에 진절머리를 치는 자는 늘 보이지 않는 저 너머 아득한 곳에 마음을 둔다. 아울러 먼 곳은 멀다는 것만으로 동경과 그리움의 아우라를 만들 테다. 그 아우라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유토피아의 아우라와 같은 그 무엇이다.

 

어느 한 시절 제주도에 머물며 날마다 바닷가에 나와 수평선을 바라본 적이 있다. 무언가에 꺾인 채 낙담하고 망연자실하던 시절, 수평선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수평선에서 본 것은 부재의 현존이었다. 수평선은 난간이고, 죽음이며, 죽음 너머의 피안,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영원이었다. 바닷가에 와서 바다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불가피하게 수평선으로 향하지만 수평선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수평선은 그것 자체로 의연하게 있을 뿐이다. 수평선은 그것을 보는 자와 바라보임의 대상 사이의 긴장, 즉 시지각적 인식의 작용이 일어난다. 봄과 보임 사이에 일종의 재교배recroisement”, 혹은 느낌-느껴짐의 불꽃이 타오른다고 말한 것은 모리스 메를리-퐁티다. 수평선은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의무와 합목적성의 현실과 피안의 경계를 일획으로 가로지른다. 그것은 주체의 시선 안에서 재교배 되면서 느낌의 불꽃으로 타오른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수평선의 가능성을

너는 타진해본 적 있느냐?

 

이 시의 첫 구절을 오래 음미하며 읽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수평선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닥은 바다의 오기(誤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은 하강이고, 소멸이지 않은가. 왜 수평선을 하강과 소멸한다고 상상했을까. 시인은 수평선을 앞에 두고 독자를 향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 수평선은 세계의 덧없는 한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것은 손을 뻗어 붙잡거나 빠른 걸음으로 달려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현존이다. 수평선은 현실의 저편의 대상이고, 따라서 그것은 환영이거나 헛것일 테다. 우리는 수평선을 보고 상상에 빠질 수는 있지만 그것을 영원히 거머쥘 수는 없다.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의 결심들일순에 꺼뜨린. 수평선은 현실의 모든 것을 삼키고 감추면서 비밀에 감싸이고 우리 욕망을 좌절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 의지의 영역 너머에 있다.

 

가장 깨끗한 것, 가장 순수한 것은 항상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그 너머는 확증할 수 없는 한에서 없다. 우리는 그 없음을 통해 있음을 견주고 그 의미를 끄집어낸다. 그런 까닭에 너머는 우리가 겪은 바 없는 비현실이고 피안이다. “지친 몸을 끌고 너머로 가려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시인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너머로 가는 일은 실패한다. “꺾여버린 돛대들이 그 실패를 암시한다. 어쩌면 그 실패는 인간 모두의 것이다. 삶은 실패로 이루어진 나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줄글 사이로 그어놓은

그의 문장, 요약적이다

 

책을 펼치면양면으로 줄글이 이어진다. 그 줄글은 저 먼 데서 한 줄로 밀려오는 물결이다. 책을 펼치면 양면으로 바다가 펼쳐진다는 자연스런 상상의 맥락 안에서 그 바다는 기억의 바다, 추상의 바다, 은유의 바다다. 책과 바다는 하나로 겹쳐진다. 책이라는 바다가 우리를 수평선 너머 아주 먼 곳까지 데려간다. 그 바다는 삶이라는 수수께끼와 혼돈과 소용돌이를 감추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그 바다를 가로질러 수평선 너머까지 나아가는 모험이다. 수평선은 바다의 생애를 한 줄로 압축한다. 수평선이 시선의 끝 간 데에 있는 것으로 삶의 한계, 생의 종착점을 표상한다면 시인은 상상에 기대어 그 한계 너머를 보려고 한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약력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하며 시인과 평론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일요일과 나쁜 날씨, 평론집으로 시적 순간』 『불과 재재등이 있음.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함.

 

   

 

 


브라우저 최상단으로 이동합니다 브라우저 최하단으로 이동합니다